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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상

나무 회상록

'나무 회상록'을 마저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다.

책을 받고 잡다한 일이 발목을 잡아 리뷰를 써야 할 오늘까지 책을 못다 읽었기 때문이었다.

 

 

 

귀한 책을 선물 받고 첫 장을 열었을 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책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 '나무 회상록'을 정리한 개요에서 밝힌 것처럼

 

서문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장편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서두에서처럼

 

주목 한 그루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이 천 년 가량을 살았던 주목이 어린나무였을 때의 기억을 펼치며 들려 주는 이야기가 범상치 않다.

 

'대자연의 섭리를 만족스럽게 여기고 겸손하게 받아들였지만

 

만일 땅 위에서는 항상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완고한 원칙에만 골몰했다면, 아마도

 

나는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대목 따위가 그렇다.

 

흔들리면서, 비틀거리면서, 혹은 바른길에서 벗어나고서야 진리를 좀 더 배우게 되던

 

우리의 삶에 대한 통찰적인 시선이 처음부터 이 책을 즐겁게 읽게 하는 매력이었다.

 

나무가 회상하듯이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우리도 어린 시절에 각자의 인생이

 

비밀로 가득 찬 보물창고처럼 멋지게 펼쳐질 것을 막연하나마 기대하였을지도 모른다.

 

 

 

생동감 넘치는 호기심으로 앎을 지향하는 나무에게 대자연은 보잘 것 없으나 박식한 귀뚜라미 같은

 

매개자를 보내어 주어 그때마다 필요한 지혜를 얻게 된다. 내게도 삶은 그랬다. 하다못해 만화방에서

 

배웠던 수많은 단어와 지식. 보잘 것 없는 고만고만한 또래들을 통해 배웠던 작은 꾀와 지혜들이 그랬으니까.

 

생물학적 엄마인 주목을 통해서 주인공 나무는 숲과 그 숲에서의 주목의 위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자연계의 서열을 배우게 되었을 때 막연하게 속으로 느꼈던 낙관적인 예감, 즉 운명적이라 해야 할까

 

엄마 주목은 신성한 숲 속의 여왕이었으며 자신 또한 엄마의 뒤를 이어 숲을 통치할 왕녀라는 사실 따위.

 

그러나 그것은 권력이나 위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주목이란다. 주목은 살아 있는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자연의 본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거든,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모든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인 셈이지.

 

또한 지상에서 가장 오래 살고, 그만큼 지혜로운 나무란다.'

 

엄마 주목이 딸에게 숲의 서열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는 대목들이 지혜로 반짝이기에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우리 바로 밑에 있는 건 다른 고상한 상록수들이야. 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니?

 

늘 푸르다는 건 단지 겉으로 보이는 특징이 아니라. 바로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거든. 항상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심지어는 혹한 속에서도 그것은 삶에 뜨거운 사랑을 의미하지. 나뭇잎을 절대

 

다 떨어내지 않고 늘 초록을 유지하면서 추위 속에서 감각이 마비되더라도 새봄의 따스한 첫 햇살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된 모습으로 기다린단다.'

 

 

 

진정한 가치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현상 이전에 본질적인 정신이라고 하는 가르침.

 

이러한 진리가 책을 읽는 내내 기쁨을 주었다.

 

오랜 시간을 생존하는 나무 주목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보편성이 좋았다.

 

인간의 삶을 보여주지 못하는 책은 결코 읽을만한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말이 되며, 그와 반대로

 

인간 삶의 보편성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책이라면 거기에서 건져야 할 지혜와 지식이 가득하다는 말이 되리라.

 

성장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노력의 과정이라고 하는 말에도 공감한다.

 

 

 

인간의 출현에 앞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가설을 접어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목이 인간을 최초로 만나는 것은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의 어느 시기이다.

 

인간은 인간의 머리를 사냥하기 즐긴다는 표현을 빌려 인간들의 호전성에 대해 고발한다.

 

인간이 살인적인 방식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남자가 아닌 여성에게서라는 것으로

 

최후의 희망으로 여성을 꼽는다.

 

 

 

인간의 역사에 여성이 차지하는 자리는 생명을 잉태하는 일로부터 생명을 키워내고 전쟁과 파괴로부터

 

보듬고 다독이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위치를 점한다 하겠다.

 

'나무 회상록'에서 여성이 등장하면서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들이 환희롭고 아름답다.

 

 

 

인간의 오랜 역사를 되짚어 보았을 때 그들이 다분히 주술적이며 의존적이어서

 

매우 종교적인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숲의 최고 신성한 존재로서의 주목을 경배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켈트의 종교에서 기독교로의 전환이

 

다루어지고 신성한 장소의 개념이던 숲에서 인간의 손으로 지은 곳 즉, 수도원이 지어지는 종교의 변천사도

 

언급이 된다.

 

 

 

엄마 주목의 죽음을 바라보며 스스로 30년 동안 성장을 멈추고 죽음의 잠을 자는

 

소설의 화자인 주목은 엄마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에 분노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모습이

 

슬픔에 직면한 인간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죽음의 깊은 잠에서 한 은둔자가 내는 소음과 실수. 그리고 불운 등을 듣고 보면서 주목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깨어난다.

 

 

 

서툴고 엉성한 한 은둔자가 주목의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면서 어느 사이

 

나무와 동화되어 나무와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과정을 그린 것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이다.

 

연리지와 같이 인간도 주목의 한 가지로 살 수 있다는 초록 인간의 등장은 우화적이고 매우 신선하다.

 

 

 

숲의 여왕이던 주목은 그 수명이 다하기 전에 인간들이 휘두른 도끼에 희생된다.

 

그것은 주목의 숲에 터를 잡고 사원을 짓기로 한 수도사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주목은 부활했다. 열 두 개의 싹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수도사들이 기적과 같은 신비감을 느껴

 

주목을 보호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여겨 주목을 없애는 대신에 그 주변에 수도원을 짓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큰 시련을 겪은 자만이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있듯이

 

주목 역시 그랬다.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상처를 입고 굴욕과 폭력, 강탈을 겪고서야 주목은 비로소

 

그 섬에서 일어났던 모든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인간들의 손에 의해 쓰러진

 

수백만의 나무들이 외치는 고통의 비명을 듣고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통치자 주목에게 의미 없는 시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시련을 계기로 지금까지 숲을 통치했던 어느 통치자보다 가장 자애로운 여왕이 되었으니까.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과거의 시제에서 더 먼 공룡이 살던 시간의 여행에 데려다 주고, 현재로 독자들을 이끄는

 

작가의 솜씨가 매우 놀랍다.

 

이 천 년이라는 시간을 살고 이제 죽음을 앞둔 지혜자인 주목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자.

 

'삶을 분석하다니,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삶이란 사는 것이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삶에서

 

우리는 오늘을 찾고자 하고 내일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세상은 영원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하는 작가의 영감어린 말에 동감을 표하면서 그가 독자들에게

 

바라는 다소의 위안과 영감, 진실을 독자인 나는 충분히 얻었다는 말로 리뷰를 끝맺는다.

 

-저자 뀌도 미나 디 쏘스피로에 대한 소개가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나무 회상록을 서문만 읽었을 때 떠올랐던 시 한 편도 함께 올린다.

 

 

 

 

 

<뿌리 깊은 나무>

 

 

 

 

 

얼마나 긴 세월을 살면 뿌리가 깊어질까

 

투쟁을 배우기도 전에 투쟁해야 했고

 

화합을 익히기 전에 화합하여 내린 뿌리

 

삶이 무엇인지

 

튼실한 가지를 키우기 전에 이해할 수 없었으리

 

키가 자람과 비례하여

 

우듬지가 굵어짐과 비례하여

 

드리우는 그림자의 경계가 넓어지고 뿌리 깊어 갔음에

 

 

 

사랑이여

 

광포한 비바람에 쓰러진다면

 

그 뿌리가 깊지 못함을 슬퍼하여라

 

무릇 만물의 뿌리란

 

한없는 포용과 인내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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