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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상

가을의 고독

                                          40대 주부였을 때 부산일보사의 꽃방석에 실은 수필

 오늘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두 딸과 남편이 부산스레 집을 나서고 나면 콧노래를 흥을 대면서 나는 청소를 시작한다. 흥겨운 음악은 흥겨운 대로 잔잔한 음악은 우수를 느끼면서 듣는 이 즐거움 오늘따라 비에 실려오는 상념이 더욱 새롭기만 한데 나는 느닷없이 나의 상념에 잠자리 같은 가벼운 날개를 달고 어디론가 감미로운 여행을 떠난다. 나는 이렇게 자신이 빠져드는 상념의 세계를 결코 탓하지 않으며 그것에 나를 맡기는 것을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이 여행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여고시절로 가본다. 교정의 몇 그루 나무가 단풍으로 색채를 달리 할 즈음이면 교정의 뜰에는 국화가 다투어 곷망울을 열기 시작했었다. 국화 더미 속에서 다투어 사진을 찍었던 우리들은 그것이 오늘날 낡은 흑백사진으로 앨범에 남아 우리들의 십 대 후반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줄지 생각이나 했을까

   여고시절은 풋과일 같은 설익은 시상으로고뇌하던 시절이었으며 수필의 언저리를 맴돌며 독서와 문학의 꿈을 키우던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보배로운 시기였다고 느껴진다. 그 시기에 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우렐리우스, 앙드레 지드, DH 로렌스 등 수많은 작가들과 만났다. 어쩌다 어두워진 교정을 걸어 나올 때 가슴 미어지도록 다가서던 국화향기를 나는 언제나 잊지 못한다.

어떤 것에 대해 아직 그리움을 남겨놓고 있는 까닭은 그것에 대해 채워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는 국화 향기 속에는 지금도 이루지 못한 문학에의 정열이 남아있는 것이리라. <미래의 시인이여, 그대는 외부에 시선을 두지 말고 철저한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쓰는 원인을 발견하십시오> 릴케의 이 권고를 되새기며 이 가을에 나는 진실로 고독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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