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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상

빌려 온 고향

 마을에서 집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골목 옆에는 나무 정자에 비스듬히 노구를 기대고 선 왕버들이 있다. 버드나무가 늘어 뜨린 실가지 사이로 강 건너 바라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볼 때마다 경탄하곤 한다. 나의 고향은 회색빛 도시 부산.  전후세대에 성장기를 보낸 나는  달리면 뽀얗게 먼지 폴폴 일어나는 신작로에서 뛰어놀며 자라났다. 문학을 하며 시골 태생의 작가들이 비밀 무기처럼 보여주는 고향에 관한 무궁무진한 기억의 단편들이 늘 부러웠다. 실개천, 올챙이, 각가지 풀꽃들과 나비와 벌. 정겨운 낮은 담장 따위 산마을은 산마을 대로 강마을은 강마을이 품은 모래톱과 꼬물꼬물 성인이 되어서도 살아 꿈틀대고 있을 기억 속의 조가비 같은 추억들. 그것들은 아무리 부러워해도 나로서는 근원적으로 가질 수 없는 그들만의 보물단지 같은 것이었다.

 

풍경

 

먼 거리를 두고 본다

손에 잡히는 거리에서는

전체를 볼 수 없다

 

풍경 속에는

도드라진 어느 하나가 아닌

어우러진 여럿의 조화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품은

그윽함이 있다

 

 

산과 산의 경계가

시나브로 지워지는

저녁이 올 무렵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보는

강 너머 풍경이 아름답다

먼 곳에 있어

아스라한 그리움

 

 

그리워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그리운

기억 속에서 겹치는 고향의 풍경

 

  명절이 되어도 찾아 갈 고향이 없다. 부모님이 떠나시고 옛집도 이미 사라져 버린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니다.

, 풍경, 이란 시는 그리움이 현현한 고향이랄까 기억 속에 잠재한 회색빛 고향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재탄생하게 되는 빌려온 고향의 모습인 셈이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 정착한지도 10년. 두 딸의 권유대로 언젠가는 시골살이를 청산하고 도시로 회귀해아할 것이다. 강아지 뽀미를 테리고 산책을 하는 저녁이면 하늘의 달이 강물 위에 물그림자로 떠서 정취를 더해주고 왜가리가 강가에 발을 잡그고 물고기를 잡으려고 오래 기다리며 서있는 정물 같은 풍경은 하나하나가 내게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모든 장면들이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린 시절의 고향을 대체하고 더 큰 그리움으로 남겨지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람 소리도 빗 소리도 시골에서는 원음 그대로 잡음이 섞이지 않아 가슴속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이 모든 것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여 낱낱이 쟁여두고 싶다. 두고두고 꺼내서 반추하며 즐거워할 이 소중한 것들. 그리움의 원형질 같은 빌려온 제2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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