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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온 시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

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

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 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2006년 "시와 세계" 가을호 에서

 

사람이 살아가며 얼굴의 표정처럼 수 많은 표정을 갖고 있는 것들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 놓은 호수라고 보면,마음의 흐름을 보는 듯한 내면의 세계를 간직한 것이 정진규 시인의 산문시의 특징이다 삽에서도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 들여야" 할까?라는 물음 속에 입 밖으로 내 뱉는 수 많은 말들보다 조용히 입 속으로 거두어 들이는 삶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이미 이 세상은 삽보다 더 강하고 힘이 센 기계화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삽은 왠지 나직하고 조용한 그러면서 땅의 온기를 가장 자연스럽게 매만져 주는 사람의 마음과 같다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하다 소중하기 때문에 윤이 나게 닦아 곳간에 세워 두어야만 하는 내 마음읜 것이다 이것은 사람 삶과 무관하지가 않다 마치 식솔들을 위해 평생 몸이 닳고 늙은 우리들의 아버지와 같은 모습처럼 앉아 있는 듯도 하다 그런 아버지의 몸을 닦아 드리는 듯한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내 몸을 염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는 말에서 정진규 시인은 사람의 삶이 이토록 간절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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