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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낭송을 준비하며

크리스마스가 다가 온다.
도시의 화려한 무대와 불빛을 떠나와
고요만을 친구삼는 시골 생활에도 크리스마스는 예외여서

시낭송의 기회를 부여 받았다.

 

감사하며 시를 고른다.

옛 시들을 읽으며 감상하니 그것이 작은 즐거움이 되어 준다.

 

1. 낙엽지는 저녁

 

시원 김옥남

 

 

겨울로 가는

11월의 하순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밟는다.

 

 

홀로 떠서 밤하늘을 순례하는

달빛의 숨결처럼

은은하게 번지는 슬픔을 안고

한 발, 두 발 걸음을 옮기는 저녁

 

 

성성하던 한 시절을 갈빛으로 갈무리한

잎새의 조용한 주검들이여

발 아래서 소멸하는

바스락거림

천지에 은성하는 성스러운 느낌!

주검이 불러오는 고요가 경건하다.

 

 

2.비의 그림

 

비가 아침부터

길 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점점이 퍼져가는 빗방울들

너의 얼굴은 동그랬지 눈과코

두툼한 입술선의 음영

굵은 목선은 그리움 때문에 자꾸 덧칠이 되고

여름내 밤마다 잠들지 못한 아픔의 편린들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에 상처로 번져간다.

네가 부르는 누군가의 이름이

네 영혼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면

싸이렌의 노래처럼 치명적 유혹일지도 모르는 것

삶은 그런 것이다. 사랑도 그런 것이다.

비가 그리는 그림은 선을 감추고 형상들을 뭉개고

갈비뼈 사이에 감춘

깊은 열정만을 암울하게 투사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걸어간 발자국

비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기 위하여

지상에 새겨진 모든 발자국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우는 중이다.

 

 

3. 홀로 먹는 밥

 

 

자그만 무쇠솥에 누룽지를 눌인다.

무료함이 찌지직 달라 붙는 소리

홀로 먹는 밥은 왠지

먹는 이가 밥이고 먹히는 게 나인 것처럼

맛을 느낄 수 없다.

최대한 구수하고 부드럽지 않으면

소화까지 어려울 것 같은, 홀로 먹는 밥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으려고

낚시터에 갔을까

밀려 오고 다시 밀려 오는 인생의 문제처럼

번복되는 파도의 생성으로 삶을 웅변하는 바다

때에 따라 섬처럼 고적함도

나쁘지 않으리라만

해맞이를 혼자 했는지

우리 각자가 홀로 밥 먹게 하고

어디론가 사라진 새해 새벽의 잠적

목욕물이 넘치고 있다.

잠궈서 멎을 외로움이면 얼마나 좋을까

 

 

4. 인류 최초의 어머니 이브

 

 

오늘날까지 인류가 잊은 것이 있다.

 

 

계명은 지엄하니

선악과를 먹지 말라

 

 

너는 그것을 먹으라

열매는 심히 먹음직하고

탐스러우니

선악을 알게 되어 신과 같이 되리라.

 

 

계명과 유혹 사이

선택의 과제는 고뇌였으리라

 

 

너는 자유의지를 지녔으니

네 뜻대로 행하라

다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

 

 

계명을 어기고서 율법을 완성시킨

여인 중 여인

인류 최초의 어머니

 

 

행간에 감춰있어 읽히운바 없으되

자상의 삶에 우리를 초대해준

이브 당신의 눈물, 당신의 고뇌

 

 

5. 너는 활화산

 

 

활화산처럼

영혼 속에 뜨거운 마그마를 품고

냉정과 열정 사이를

넘나들며

자유롭되 질서를 유지하는 너는

카메라를 들때면

어김없이

양쪽 어깨에 거대한 날개가 돋아난다.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

창조의 창이 열리고

세상을 향한 무관심이 사랑으로 치환되어

사정없이 내부로 밀려드는

홍수와 같은 비밀들.

비밀의 열쇠를 가만히 비틀며

들여다 보는 순간의

숨이 멎는 집중

너는 사진을 사랑하고

사진을 찍을 때 비로소 숨을 쉬는

거대한 소용돌이 활화산이다.